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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동시) 서호의 저녁놀 산그림자 덧글 0 | 조회 76,434 | 2014-02-05 08:05:48
함동진  

(기행동시)  서호의 저녁놀 산그림자  /  함동진

 

 

 

서호의 저녁놀 산그림자

               (西湖-수원)

 

   

                                  함동진

 

 

 

서을에서 남행 기차를 타고

수원을 지날 때 차창밖에

아름다운 호수 하나 보여요

 

옛적에 수원팔경의 하나

18세기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을 축성했을 때

가뭄을 이겨내기 위해 만든

저수지라 하지요

 

아름다운 기생의 모습을 닮았다는 산

여기산의 그림자가 수면에 잠겨있는

서호를 수원의 눈썹이라 하고요

중국 항주의 미목眉目보다 아름다운 곳이라 하지요

해질 녘 저녁노을과 함께

서호의 수면에 비치는

여기산의 모습은 절경이었대요

 

우람한 노송가지가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운

제방을 따라가면 폭포 물줄기 흘러내리고

그 위에는 아담한 항미정杭眉亭이 있었다지요

 

여기산은 흰두루미 서식지

멀리서보면 백목련 꽃핀 듯 나무 위 깃들고

물길 따라 오르내리는 춤사위

호수에는 물고기 튀어 오르고

백로, 왜가리 날개 짓

청둥오리 자맥질

너구리 족재비 갈대숲 쉬다 가는 곳

자연은 그대로가 좋은데

시민공원화하여 사람소리

빙빙둘러 아파트 숲

시끄럽고 더러워 못살겠대요.

 

 

 

   2011.04.20  B 409    사진/함동진

            왼쪽 흰색건물 뒤로 보이는 산이 여기산(如妓山)이다. 또는 여미산(如眉山-기생의 눈섭같다)이라고도 한다.

 

 

* 서호(西湖) :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에 소재하며 조선조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당시 부근 농민들의 관계용수로 사용하기 위하여 서쪽에 만든 호수로 항미정이란 정자가 있으며 여기산의 그림자가 수면에 비치며 노을이 질때의 절경이 대단히 아름다워 수원팔경의 하나라 하였다.

 

* 정조(正祖: 17521800) :

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 아버지는 사도 세자이고,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이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탕평책을 계승하여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규장각을 설치하고 뛰어난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고 활자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켰고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목표로 하는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등 여러 방면에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문집으로 [홍재전서]가 있다.

 

* 여기산(如妓山해발105m) :

서호 인근에 서호천을 끼고 있는 산, 두루미 서식지가 있어 출입통제를 하여 보호받고 있다.

 

* 항미정 杭眉亭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1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조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 당시 부근 농민들의 관개용수로 쓰기 위하여 인공호수를 동서남북에 축조한 것중 서쪽에 위치한 호수인 서호의 남쪽에 세운 정자로 낙조와 잉어가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이 곳의 잉어는 특히 유명하여 궁중에 약용으로 진상했다고 하며 정자의 이름은 소동파의 [항주의 미목 杭州眉目]이란 시에서 딴 것이라고 한다

 

* 미목眉目 :

중국 항주의 서호는 많은 문인 객文人墨客들이 사랑한 곳으로 특히 백낙천, 소동파가 즐겨 시를 읊었던 곳이다. 특히 송나라 때의 시인 서동파는 서호를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해서 서자호西子湖라고 불렀다. 양귀비와 함께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가 항주의 미인이라는 데서 서호를 서시에 비긴 것이다.

 

   2002. 8. 11. 수원의 서호 호수공원을 산책하고 나서.

 

 

깊은산골(長山)

함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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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4.20   B 410    사진/함동진

                항미정 杭眉亭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251에 소재하고 있으며 조선조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 당시 부근 농민들의 관개용수로 쓰기 위하여 인공호수를 동서남북에 축조한 것중 서쪽에 위치한 호수인 서호의 남쪽에 세운 정자로 낙조와 잉어가 유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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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팔경

 

 

                                              2010.07.20-004 광교산공원수원8경광교적설(光敎績雪)       사진/함동진

광교적설(光敎績雪) - 광교산에 눈쌓인 모습

   광교산은 山紫水明(산자수명)水原主山으로서 심산유곡의 맑은물이 흘러 수원천을 이룬다. 한 겨울의 백설도 장관이려니와 시루봉에 새봄이 찾아올 무렵의 춘설 또한 비경이다.

    광교산이란 "찬란한 광채가 이 산에서 하늘높이 솟구쳤다" 고 하여 생겼으며 팔십구암자가 있는 이 산의 부처님으로부터 나온 광채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2010.07.20-006 광교산공원수원8경팔달청람(八達晴嵐)       사진/함동진

팔달청람(八達晴嵐) - 안개에 감싸여 신비로운 팔달산

   남기(嵐氣)에 감싸여 신비로운 팔달산의 정경으로서 맑게 개인 날 팔달산에 안개가 피오르는 정경이다. 市街地 中央처럼 솟아있어 항상 사람들이 늘 가까이 대할수 있고 팔달산 松林사이로 맑게 보이는 하늘, 山頂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 무렵 또한 佳景(가경)이어서 八達暮雲(팔달모운)이라고도 한다.

 

 

 

                                       2010.07.20-001 광교산공원수원8경 남제장류(南堤長柳)    사진/함동진

남제장류(南堤長柳) - 긴 제방에 늘어선 버드나무

   南提는 화홍문에서 화릉산앞까지 이르는 수원천의 긴 제방이며 그둑 양편에 늘어서 있는 수양버들을 일러 長柳(장류)라고 한다. 이 제방을 따라 내려가면 지금의 細柳洞인 위버드내, 아래버드내가 있으며 버들이 많은 고장이라서 一名 柳京(유경)이라 일러 오기도 했다. 천사만사(千絲萬絲)늘어진 堤防의 수양버들 사이로 허리고운 여인이 보이고 꾀꼬리가 季節謳歌하는 想像에 잠겨보라.

 

 

 

                                                      2010.07.20-005 광교산공원수원8경화산두견(花山杜鵑)     사진/함동진  

화산두견(花山杜鵑) - 화산의 두견새 울음소리

   소나무 꽃가루가 날리는 3월이 오면 진달래 꽃이 화산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두견새가 화산을 날며 울어댄다. 화산에는 사도세자가 잠들고 그 아드님이신 정조대왕 또한 유언에 따라 옆에 묻히셨으니 저승에 가서도 효성을 바치시려는 뜻이다. 봄에우는 두견새의 울음을 사람들은 애끓는 외침과 어버이를 향한 正祖大王의 그리움으로 받아들인다.

북지상련(北池賞蓮) - 북쪽연못의 흰색 붉은색 연꽃

지금의 일왕저수지인 北池(북지)의 본 이름은 萬石渠(만석거)또는 교구정으로서 흰색, 붉은색의 연꽃이 수면에 그득했다. 연꽃이 만발했을 때 찬란한 광경을 영화정(迎華亭) 정자에서 바라보면 연꽃향에 저절로 취할 정도이다.

 

 

 

                                                   2010.07.20-003 광교산공원수원8경서호낙조(西湖落照)       사진/함동진

서호낙조(西湖落照) - 서호 노을에 드리운 여기산 그림자

   아름다운 기생의 자태와 같은 여기산의 그림자가 수면에 잠겨있는 西湖水原의 눈썹으로 상징되며 中國 항주의 眉目(미목)보다 아름다운 곳이다.

    노송가지가 수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堤防을 따라가면 높이 2()이나 되는 폭로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그 위에는 아담한 杭眉亭(항미정)이 있다.

    지금은 오염으로 西湖는 죽은 호수가 되었으나 여기산 공원 조성과 서호 되살리기 운동이 추진중이다.

 

 

 

                                               2010.07.20-002 광교산공원수원8경화홍관창(華虹觀漲)       사진/함동진

화홍관창(華虹觀漲) - 화홍문의 비단결 폭포수

     光敎山 깊은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水原川 맑은물은 華虹門 일곱水門의 폭포수가 되어 무지개 빛으로 부서져 내린다. 또한 흰 비단결 같은 물안개를 일으키며 漲溢(창일)하여 흘러내리는 수원천의 일곱물줄기는 川邊의 수양버들과 더불어 絶景이 되었으나 지금은 크게 오염되어 옛모습이 안타깝다.

 

 

 

                                         2010.07.20-007 광교산공원수원8경용지대월(龍池待月)        사진/함동진

용지대월(龍池待月) - 용지에서 월출(月出)을 기다리는 경치

龍池訪花隨柳亭(방화수류정)아래 연못을 말하며 華虹門과 더불어 勝景(승경)을 이룬 곳으로 방화수류정의 그림자가 수면에 떠오르면 無我境을 이루게 하는데 수원천의 물이 龍池를 거쳐 용머리를 본따서 만든 돌구멍으로 흘러 넘겨 보냈기 때문에 일명 龍頭閣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龍池1,900여평에 달하여 水面에 떠오른 달을 보며 정자에서 마시는 술맛의 취흥은 가히 풍류의 최고라 할만하다. 또한 화홍문에서 창룡문까지의 산책로도 좋다.

 

 

 

 2010.07.20-008 광교산공원 수원8경북지상련(北池賞蓮)008        사진/함동진

북지상련(北池賞蓮) - 만석거(萬石渠)에서 연꽃  

萬石渠는 수원의 대표 임금인 조선 정조대왕이 華城을 건설하고 1794년경에 그와 함께 만든 인공저수지이다. 이름은 만석거(萬石渠)로 한자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쌀을 만석이나 생산할 수 있을 정도의 저수지를 인공적으로 만든 곳이 현재의 만석공원의 저수지이다. 실제로 이 저수지가 만들어 지고 나서 2년 후에 쌀이 만석이나 더 생산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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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6.28 수초와 꽃 130

          서호의 둑방의 이름은 [축만제祝萬堤]이다.  축만제 위에 있는 소나무.

  축만제: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축조한 저수지로 축만제둔의 관개시설로 만들어졌다. 정조23년(1799) 정조는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만제를 만들게 하고 수문 2곳을 갖추었다. 몽리면적은 232두락으로 화성 주변의 인공 저수지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으며 과학 영농의 본보기 시설물이다. 만석거와 만년제에 뒤이어 축조된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로 불리고 있으며 서호에 비치는 낙조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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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부 가

       가사

 

1. 나 어릴 때 업어주시던 당신은 떠나시고

말없는 밤길에 부엉이만 울었소

덧없는 손 끝에 묻어나는 그리움

눈물로 쓴 사연을 말하여주오

- 오늘도 화산(華山: 수원) 가는 길 그리움에 가는 길

불러봐도 대답없는 그리운 아버지

 

2. 나 어릴 때 업어주시던 당신은 떠나시고

한없는 서러움엔 불효자는 울었소

떨리는 손 끝에 젖어오는 그리움

눈물로 쓴 사연을 말하여주오

- 오늘도 화산가는 길 눈물에 가는 길

소리쳐도 대답없는 그리운 아버지

 

해설

* 정조(正祖: 17521800)

   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61800). 아버지는 사도 세자이고,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이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탕평책을 계승하여 골고루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규장각을 설치하고 뛰어난 학자들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고 활자를 개량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켰고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였다. 특히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목표로 하는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했으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등 여러 방면에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문집으로 <홍재전서>가 있다.

 

* 사도세자 (思悼世子 17351762)

   영조의 둘째 아들. 조숙하고 총명한데다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언행에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호기심이 많아 지난날의 정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기존 질서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영조의 후궁 문숙의와 노론의 강경파들은 질투심과 두려움으로 견제하던 중, 그의 비행을 내세워 모함하였다. 마침내 1761년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순행하고 돌아오자, 반대파들은 왕세자의 체통을 잃게 했다고 논박, 서인(庶人)으로 폐하게 하고, 드디어는 뒤주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종래에는 사도 세자의 죽음을 악질과 광행으로 인해 비롯되었다고 보아 왔으나,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붕당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희생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노래는 MBC 사극 대왕의 길의 주제곡으로 정조가 사도세자를 그리는 내용이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나중에 장조로 추존)에 대한 효심이 극심했고, 사도세자의 능이 있던 수원으로 자주 행차를 했다. 이런 수원으로의 능행이 단순히 효도 차원만이 아니라 대단히 정치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다음의 글은 정조의 수원능행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수원성에서 정조를 생각한다>

                      신림중 안정애 (교사)

 

   정조의 집권기 18세기 후반은 임진왜란으로부터 200년 후, 대원군 집권보다는 약 100년 전이다. 왜란 후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조선만은 유독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변사를 중심으로 서인 (노론) 세력의 집권이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선 강토의 백성들은 땅을 일구어 주린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을까. 전쟁의 영웅들은 새로이 소중화의식, 주자 정통론, 율곡의 붕당정치론으로 무장한 전쟁의 책임자들에게 반군이란 이름으로 제거되고....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도 탕평이란 이름으로 이들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총명한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희생시키고 말았다. 그때가 정조의 나이 열 살. 그가 즉위하기까지의 14년간은 참으로 살얼음판을 딛는 듯한 인고의 세월이었다. 세종을 능가한다는 두루 넓고 깊이있는 학문과 승화된 예술의 세계는 이 시기부터 몸에 붙은 것이었으리라.

   즉위 원년 (1776)부터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에 의한 시해의 움직임이 있었다. 조정의 신하들이며 궁중의 속인들, 군영의 병정까지 벽파에 의해 장악된 상황. 신변의 위험이 항존하는 정조를 누가 지엄한 군주로 두려워했는지. 더구나 궁중에는 벽파의 방패인 대왕대비, 즉 그의 2살 위인 할머니 정순왕후 김씨가 있었다. 그녀는 사도세자의 아들들, 정조의 이복 형제인 은신군, 은언군들을 차례로 제거해 나가고 있었다.

   정조의 개혁은 노론 세력의 제거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의 알짜배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요직을 세세로 독점하여 온 노론 세력이 무엇이 부족해서 개혁을 원하겠는가. 정조는 즉위하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규장각은 처음에는 이른바 정조 때의 문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학문 연구의 산실, 즉 왕실 도서관이자 연구실이었다. 그러나 규장각은 점차 강화되고 정조는 이들 각신들을 특별히 우대하였으니, 규장각은 정조의 노론 타격의 지배 이데올로기, 정책들을 수립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정조 개혁 두뇌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탕탕평평실. 정조는 자신의 집무실을 탕탕평평실로 부르면서 이른바 영조의 온건한 탕평에서 보다 적극적인 탕평책을 펼친다. 숙종이래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남인 계열을 적극 등용함으로써 노론을 견제하고자 하였으며, 유교 근본주의를 주창, 성인의 정치, 즉 신권보다 왕권 우위의 강력한 왕정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인들은 이무렵 조선에 들어오는 서학에 깊이 연루되고, 이는 노론 벽파의 남인 제거에 주요한 명분으로 작용한다. 이에 대해 정조는 문체 반정으로 대응하고...

   정조가 노론 세력보다 우위에 서서 정치를 펼쳤던 시기는 대략 1790년부터 1795년 무렵. 그를 보좌했던 남인의 영수가 번암 채제공으로 정조의 개혁을 이야기할때 빼놓을 수 없다. 정조의 대표적인 개혁 조치로 꼽히는 신해통공(금난전권의 폐지;1791) 이 있었다. 신해통공은 노론 세력과 결탁되어있는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함으로써 노론의 재정에 타격을 주었으며, 자유로운 상공업을 장려하여 나라의 부를 쌓아야 한다는 소신이 표명된 것이다. 또 이미 노론이 장악하고 있는 5군영으로부터 독립된 병영이 요청됨에 따라, 왕의 친위군으로 설치되었던 장용위의 규모를 크게 확대, 군영체제를 갖추었으며(1793) 수원성곽이 축성되었다.(1794-96) 장용영은 도성 방어의 내영과 수도권 방어의 외영으로 구성되었으며, 외영의 본부로 수원성이 건설되었다.

   수원성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팔달산 아래에 건설하였는데, 특별히 재상인 채제공의 감독하에 건설되었다. 수원성은 남인인 정약용이 1792년 발명한 거중기가 사용되었으며 북학파(노론 중의 신진 진보세력)가 가담하는 등 18세기의 기술력이 총동원되어 만들어졌고, 전국 각 도의 갑부를 강제로 모아들여 의도적으로 상업적으로 육성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조처의 뒤에는 정조가, 그리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정조와 노론 벽파와의 갈등이, 정조 개혁 성패가 달려 있었다. 수원성의 축성 과정에서 정조는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임명했고, 그 곳에서 채제공은 사도세자의 추모제를 지낸 후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세력들의 토멸을 주장하는 상소를 썼다. 그러나 1799년 채제공은 죽었다. 그리고 1800년 무예와 정신적인 절제로 단련된 정조가 갑자기 급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 그에 따라 붙는 독살설.

여하튼 우리 역사상 어쩌면 가장 중요한 개혁의 군주였던 정조는 세인들의 갖가지 추측과 평가 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부각되고 있다. 개인으로서는 세종을 능가하는 학자, 저술가, 예술가로, 눈에 보이는 각종 출판물이 말해주는 문화의 르네상스를 이룬 영명한 군주로. 규장각을 통해 국조보감, 규장전운, 일성록, 증보문헌비고 등 50년 영조 통치대를 능가하는 저술의 편찬,출간이 이루어졌고, 열하일기, 담헌집, 발해고, 무예도보통지, 동사강목, 북학의, 과농소초 등도 저술되었다.   

   정조의 개인 문집인 홍재전서,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이 있고, 중인 이하의 위항문학도 지원하였다. 그와 그의 시대에 가득찼던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그로 하여금 서학에 대해서조차 여유있는 대응을 갖게 하였다.

수원 성곽, 융건릉(융릉은 사도세자의 능, 건릉은 그 옆에 묻힌 정조의 릉),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용주사, 수원의 곳곳에는 정조의 사무친 원한과 지극한 효성이 있고, 그것을 넘어 그가 꿈꾸었던 개혁의 이상. 그것의 결과로 펼쳐졌을지도 모르는 조선의 새로운 세계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정조가 한달이 멀다하고 다니던 능행길을 따라 그가 담아내려던 조선 민중의 마음이 아직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남아 있다.

   잦은 능행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상, 민심을 직접 교감하고자 했으며, 이미 영조때 실시되었으나 허명에 불과했던 서얼 차별 철폐를 끝까지 실천하여 관철시키고, 서북인을 등용하고, 공사노비제도의 폐지까지 검토했던 왕. 만일 그가 노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더라면 지금쯤 우리 나라는 어찌되었을까. 한국판 절대왕정을 꿈꾸었던 계몽 군주. 19세기가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본격 개혁으로 시작되었다면 그 이후의 우리 역사, 20세기 후반의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의 개혁이 실패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고대 성왕정치의 복귀라는 이데올로기는 너무 과거 지향적이었을까. 그를 지지할만한 세력, 실학파, 부농들, 상인들, 아니면 민중의 세력은 왜 그렇게 미미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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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시 광광명소 문화재 찾기 http://www.2002suwon.net/tour/mun_11.html

 

화령전 

화성기적비

동북각루

화성행궁지

팔달문동종

창성사진각국사대

각원조탑비

수원향교

미륵당

봉녕사석조삼존불

지지대비

항미정

심온선생묘

정유선생묘

김준용장군전승지

봉녕사불화

거북산당

무형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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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항주와 서호

 

항주(杭州)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13세기에 이곳을 보고 나서세상에서 가장 곱고 멋있는 도시라고 경탄할 정도로 항주는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그래서 예전부터 중국 사람들은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抗)'이라는 말로 그 아름다움을 극찬했으며, 어떤 시인은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도 좋다" 는 말을 남겼다. 항주는 4천 년 전부터 고대문화가 일어났으며, 춘추시대에는 월()나라의 수도였고 후에 남송(南宋)의 수도가 된 역사 깊은 곳으로, 수나라 때 비로소 항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도 오()나라와 월()나라가 이 역에서 흥망성쇠를 하고 있을 때 나온 말이다. 13세기 말에는 90만명에 이르는 인구를 포용하고 10개의 시장에 여러 종류의 상점, 음식점, 극장이 줄줄이 서 있는 속에서 떠돌이 연예인, 이국인의 발길도 잦아서 그 번화함이 원()이 점령한 뒤에도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인 최대의 소망은 관직에서 은퇴한 후 항주에 저택을 짓고 소 의 미인과 함께 광주의 음식을 먹고 사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항주는 중국인의 마음에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절강성의 성도이며, 옛날의 번영에 비하면 차분하고 조용한 고도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역사와 문화의 좋은 경치를 모두 합쳐서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광과 휴양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신안강 수력발전소가 만들어진 이래 전통적인 견직물 공업외에 기계, 화학공업도 성하게 되었다. 지금의 인구는 약 100만명 정도 된다.

   

 

서호(西湖)

 

   항주에 서호가 없었다면 항주를 갈 이유가 없을 것이라 할 정도로 서호는 항주에서 가장 아름답고 볼 만한 곳이다. 항주를 관광하려 온 사람 중에 명성에 비해 별로 볼 것이 없어 다소 실망하더라도 서호만큼은 그 아름다움에 취할 것이다.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으로, 면적 5.6, 둘레 15의 타원형 호수로 평균 수심은 1.8m이며, 깊은 곳은 2.8m정도 된다. 중국의 호수치고는 별로 크지는 않지만 그 아름다움이 빼어나서 절색의 구릉과 계절을 장식하는 나무, 아침과 저녁으로 비오는 날과 개인 날, 그리고 동 각각 나름대로의 다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사람을 매료시킨다. 호수의 풍경을 빼고도 정자와 누각, 사원과 탑 등이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봄에는 이세상의 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 주위는 마치 꽃으로 싸안은 것처럼 보인다. 여름이 되면 모란, 석남화(石楠花), 만수국(萬壽菊), 백일초(百日草)와 더불어 호면을 덮는 백련(白蓮), 홍련(紅蓮)이 만개한다. 가을은 가을대로 물푸레나무 향기가 은은하게 호면에 흐르고 난과 국화의 큰 송이꽃이 핀다. 백설이 내리는 겨울에도 꽃은 끊이지 않아 청초한 동백꽃과 일찍 피는 매화가 봄이 곧 찾아올 것을 알린다. 서호는많은 문인 객(文人墨客)들이 사랑한 곳으로 특히 백낙천, 소동파가 즐겨 시를 읊었던 곳이다. 특히 송나라 때의 시인 서동파는 서호를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에 비유해서 서자호(西子湖)라고 불렀다. 양귀비와 함께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가 항주의 미인이라는 데서 서호를 서시에 비긴 것이다.

   서호는 호수면을 가르는 백제(白堤)와 소제(蘇堤)라는 두제방으로 나뉘어져 외호(外湖), 내서호(內西湖), 악호(岳湖), 서 리호(西里湖), 소남호(小南湖)로 세분되는데 한결같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중국인들은 서호의 아름다움을 10가지 절경으로 꼽았는데, 겨울에 눈이 녹으면서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단교잔설(斷橋殘雪), 백제 서쪽끝에 호수면과 거의 같게 만든 조망대인 평호추월(平湖秋月), 서북쪽 비정( )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호수에 연꽃 향기 그윽한 곳인 곡원풍하(曲院風荷), 시인 소동파가 만든 제방인 소제춘효(蘇堤春曉), 5백여 그루의 모란뿐 아니라 2백 종 15천 그루의 꽃에 둘러싸여 홍어지(紅魚池)에서 노는 분홍빛 잉어를 바라 는 즐거움에 연유해 붙어진 화항관어(花港觀魚), 서호의 동남쪽에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가 고운 곳인 유랑문앵(柳浪聞鶯), 호수 서남쪽에 있는 남고봉(南高峰)과 서북쪽에 있는 북고봉(北高峰)이 산수화처럼 운치가 있는 쌍봉운( 峰雲), 서호 안에 만든 인공섬으로 이 섬 남쪽에 있는 높이 2m의 석탑에 난 구멍으로 바라보는 달이 아름다운 삼담인월(三潭印月), 지금은 종이 없어서 들을 수 없지만 정자사(淨慈寺)와 영은사(靈隱寺)에서 울려오는 종소리가 운치를 돋구는 남병 종(南屛晩鐘), 뇌봉산(雷峰山) 꼭대기에 있던 뇌봉탑(雷峰塔)에서 비치는 석양이 분위기가 있는 뇌봉석조(雷峰夕照)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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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PPY SU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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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Harmonious (조화․화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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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Abundant (풍부)

                             풍부한 문화관광의 도시 수원

               P -Paramount (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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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Prosperous (번영)

                            번영된 미래가 약속된 도시 수원

               Y -Young (젊음)

                            젊고 역동적인 도시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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